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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엄마의 보통날

[육아에세이] 엄마가 미안해

by 또리맘님_ 2021.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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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끝자락이 되자 집 뒤 공원은 알록달록한 낙엽이 떨어져 나뭇잎을 좋아하는 아기의 노다지가 되었다.
자기만의 깐깐한 기준으로 예쁜 나뭇잎을 고르고 골라 손에 쥐고, 또 쥐고 나면 조막손이 단풍으로 가득한데
유모차가 덜컹이는 한이 있어도 단풍잎 꼭 쥔 주먹을 풀지 않고 기어코 집까지 단풍을 들고 와
현관 입구가 바스락거리는 낙엽으로 어지럽다. 물론 청소는 나의 몫이다.



처음에는 제 딴에 나뭇잎을 고른다는 사실을 몰라보고 아무거나 눈에 들어오는 걸 쥐는 거겠거니 했는데
가만 보고 지나치는 나뭇잎도 있고 가다가도 다시 와서 줍고 가는 나뭇잎이 있고
두 손을 보니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 주황색 나름대로 색깔별로 있길래
아이에게도 자기만의 기준이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집에서 산책 나온 또래의 아기들이 비눗방울 놀이를 하든, 우리 아기에게 관심을 가지고 인사를 하든,
나뭇잎을 모아 흩뿌리든 쥐어주든 간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묵묵히 자신만의 나뭇잎을 찾는데
선생님께서 "어머 넌 참 낭만적인 아기구나." 하신 말씀이 재밌었다.
낭만적이라는 위트 있는 단어에서 선생님의 선생님으로서의 여유가 느껴졌다.
아이를 보는 시선에서 장점을 찾아 예쁜 말로 포장할 수 있는 재치는 교육자로써의 내공이자 능력이다.



꿈틀거리는 지렁이도 관찰하고 그렇게 두 시간 가까이 있다 보니
꽤 쌀쌀해져 와서 들어가서 밥 먹자 하고 얼른 아이를 유모차에 태웠다.
안전벨트를 매고, 급히 집으로 가는데 아기의 한 손에 있던 단풍잎이 떨어졌다.
"떼또 (뗐어=떨어졌어)"
평소 같으면 주워 주었겠지만 현관 청소할 생각, 아기 손을 씻기며 꼭 쥐고 있는 단풍을 뺏을 생각에
귀찮아져서 모른척하고 얼른 가고 있는데 나머지 한 손에 있는 단풍잎도 떨어지고 말았다.
"떼또, 떼또"
"얼른 가서 맘마 먹자!"
단풍잎을 얼른 잊을 수 있게 유모차를 씽씽 달렸지만 아기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왔다.
"떼또!!!!!!"


집 앞 엘리베이터에 다다르자 아이는 떼또를 외치며 유모차를 탈출하려고 했고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는데
집 안으로 들어가자 뒤집어지고 난리가 났다.
단순한 생떼가 아니었다. 서러움과 원망, 자포자기가 느껴지는 함축적인 몸사위였다.
'내가 어떻게 그 잎을 골랐는데... 엄마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엄마 미워. 엄마 나빠.'
아마 아기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초등학교 때, 할아버지께서 용돈으로 천 원을 주시길래 뭘 살까 고민하다가
선생님이 갖고 계셨던 하얀 분필이 갖고 싶어서 문구점에 들러 분필 한 다스를 샀다. (요즘엔 다스라고 안 쓴답니다.)
새하얗고 뽀얀 분필 사이로 분홍, 파랑 분필도 더러 섞여있었다.
그걸로 딱히 뭘 하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가지고 있고 싶었는데, 아빠가 보시자마자 동의도 없이 가져가셨다.
할아버지 댁에 낙서를 해 놓을까 봐 걱정이 되신 거지만 아빠에 대한 원망, 존중받지 못한 서러움 같은
복잡한 심경이 미움으로, 원망으로 다가왔다. 그땐 어려서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는 몰랐지만.
그런데 내가 아기에게 똑같이 했다. 말 못 하는 아기도 감정이 있건만....


아기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아직은 뒤치다꺼리하는 게 전부인 월령이라 미안할 일도 딱히 없고
엄마의 권위도 권위지만, 엄마가 미안하다는 말을 쓰면 아기는 더 혼란스러워진단다.
미안하다는 말을 들음으로써 엄마의 잘못을 엄마가 인정한다는 사실이, 늘 옳아야 하는 엄마가 잘못을 한다는 사실이
엄마를 의지하는 아이에게는 크게 다가오나 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기에게 마음으로 사과를 하고 싶다.
네가 좋아하는 것이 한낱 쓸데없는 나뭇잎에 불과하더라도 그에 대한 존중을 해 주겠노라고.
앞으로 어떤 것을 좋아하든 간에 말이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친 아기는 기억을 못 할지도 모른다. 아니 못 할 것이다.
엄마랑 첨벙첨벙하러 가자 하고 얼른 따뜻한 목욕물을 받아 물놀이를 시켰더니 기분이 좋아져서 금세 까르르 웃고 잘 놀았다.
그러나 가시지 않는 눈물로 벌게진 눈가를 보는 내 마음은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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